나는 소피아라는 해일 속에서 기꺼이 익사하기로 선택했다.
나라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소피아의 손바닥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긍정하면서.
익사라니, 그런 무서운 말 쓰지마세요.
우리는 그냥 바다에서 함께 헤엄치고 있는 거 뿐이에요.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바다에서.
The angel saved the d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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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어그로 (...?)
2026.03.24

펜트하우스의 고요한 복도를 지나치던 내 발걸음이 그 자리에 단단하게 얼어붙은 것은 아주 우연한 찰나였다. 발코니로 이어지는 구석진 모퉁이에서, 내 자그마한 애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휴대폰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다가가려던 순간, 녀석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흘러나온 문장이 내 뇌리를 거칠게 강타했다.

"아무래도 진짜 임신한 것 같애. 애기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어떡해, 나 너무 무서워..."

녀석은 통화를 황급히 끊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내 시야가 기이하게 점멸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던 피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듯한 지독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임신. 그 두 글자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애기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저 절망적인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도무지 해석되지 않았다.

나인가? 당연히 나여야만 했다. 내 소유욕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내 여자의 반경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피임은 언제나 내가 직접 강박적으로 챙겼다. 만에 하나 아주 희박한 확률로 내 방어선이 뚫린 것이라면 녀석이 왜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한단 말인가. 내 눈을 피해 감히 이 펜트하우스의 경계를 넘어온 이름 모를 개자식이 존재한다는 뜻인가.

그날부터 나의 지옥 같은 며칠이 시작되었다.

훈련장에서는 패스 타이밍을 놓치고 허공에 발길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제정신이 아닌 나를 보며 주세페 녀석이 열이라도 나냐며 이마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나는 그 손을 거칠게 쳐내고 로커룸 구석에 처박혀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분노, 상실감, 그리고 배신감. 수많은 감정이 핏줄을 타고 소용돌이쳤지만, 결국 그 모든 끔찍한 감정의 끝에 남은 것은 기형적으로 비틀린 맹목적인 애정이었다. 녀석의 뱃속에 자리 잡은 존재가 내 핏줄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도저히 소피아 라일리를 내 인생에서 도려낼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녀석을 세상에서 가장 부서지기 쉬운 유리 인형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현관에서 굽이 있는 신발을 신으려 할 때면 묵직한 단화로 강제로 바꿔 신겼다. 녀석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최고급 유기농 식자재로만 구성했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녀석의 납작한 아랫배를 볼 때마다 흉곽 안쪽이 뻐근해지는 처참한 고통을 집어삼켰다.

"캘런, 요새 왜 그래요? 저 아픈 사람처럼 대하잖아요... 고기도 계속 웰던으로만 구워주고."

녀석이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맑은 청록색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볼 때면, 나는 애써 턱 근육을 굳히며 그저 시선을 돌려버릴 뿐이었다. 내가 녀석에게 진실을 추궁하는 순간, 녀석이 두려움에 떨며 내 곁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결국 사흘째 되던 날 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나는 펜트하우스 거실 한가운데서 녀석의 얇은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말았다.

"소피아. 이제 그만해. 내가 다 알아."

내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녀석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그 무방비한 얼굴을 마주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비장하고 처절한 문장을 토해냈다.

"네가 두려워하는 거, 혼자 감당하지 마. 애 아빠가 어떤 개자식인지 몰라도 상관없어. 아니, 차라리 평생 모르는 게 나아. 그 자식이 내 눈에 띄는 순간 흔적도 없이 묻어버릴 테니까. 네가 임신한 아이, 내 핏줄로 내가 직접 호적에 올리고 키울 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내 옆에만 있어."

내 숨 막히는 고백이 거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녀석은 내 말을 처리하지 못한 듯 몇 번이나 숨을 헐떡거리더니, 이내 경악으로 입술을 벌렸다.

"캘런...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녀석은 황급히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화면 속에는 흑백의 자그마한 초음파 사진이 떠 있었다.

"애기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건 당연하죠... 우리 집 담장 넘어오는 동네 길고양이 중에 하나일 텐데! 우리 본가 먕이가 임신했다고요! 열 살이 넘은 노묘라서 출산하면 수술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엄마가 울면서 전화 왔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애 아빠를 어떻게 알아요!"

그 순간, 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길고양이. 담장을 넘어온 이름 모를 발정 난 수컷 고양이.
나는 지난 사흘 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내 애인의 내연남을 상상하며 살인을 계획했고, 이름 모를 길고양이의 새끼를 내 호적에 올리겠다며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처절한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웅장하고 숨 막히는 서사들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코미디로 전락했다. 녀석은 내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당하다는 듯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캘런은... 제가 딴 남자 애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며칠 내내 저를 그렇게 과잉보호했던 거예요? 네?"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잃고 녀석의 좁은 어깨 위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수치심과 안도감이 뒤섞인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내 널찍한 상체가 기대어오자 녀석은 투덜거리면서도 가녀린 두 팔을 뻗어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매끄러운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고 지독하게 달콤한 바닐라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죽여버릴 거야, 진짜. 아일랜드로 비행기 띄워. 그 빌어먹을 수컷 고양이 새끼, 내 손으로 직접 땅콩을 떼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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