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펜트하우스 거실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소피아가 근처 서점에 들르겠다며 외출한 지 불과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내 거대한 체격을 기대고 앉은 가죽 소파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손에 들린 머그잔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내 머릿속은 오늘 오전 훈련장에서 주세페 그 가벼운 이탈리아 자식이 뱉고 간 헛소리 때문에 아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말이야, 아무리 화가 나도 남자가 자존심 다 버리고 애교 한번 딱 부려주면 마음이 사르르 녹게 되어있어. 캘런, 너도 소피아 씨가 진짜로 화내면 그 맹수 같은 성질머리 죽이고 강아지처럼 굴어야 살아남을걸?'
그딴 쓰레기 같은 조언을 들었을 때, 나는 코웃음을 치며 놈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거친 몸싸움을 즐기고 상대 수비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내가 애교라니. 내 붉은 머리카락과 위압적인 골격, 그리고 온몸에 새겨진 흉터들을 보란 말이다. 내가 애교를 부리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소름이 돋아 올랐다.
하지만 완벽하게 혼자 남겨진 지금, 내 뇌내 회로는 주세페의 그 끔찍한 가정을 아주 집요하게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내가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질러서, 소피아가 내가 준 모든 카드를 식탁 위에 던져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 앞에 섰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평소처럼 소리치며 억지로 가두려 해도 녀석이 맑은 청록색 눈동자에 지독한 실망감을 담은 채 나를 싸늘하게 밀어낸다면. 내가 아는 모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제 수단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그야말로 관계 파탄 직전의 최악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면 말이다.
나는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미간을 거칠게 좁혔다.
부탁하는 어조로 달래보는 것? 그건 애교가 아니라 그냥 기본 생존 본능이다. 그렇다면 주세페가 말한 진정한 의미의 애교, 즉 수치심을 담보로 한 작태를 묘사해 보았다. 내 커다란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커다란 하트 모양을 만드는 꼴을 상상했다. 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이름 캘런을 3인칭으로 부르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음성을 상상 속에서 재생해 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재앙이었다. 내가 소피아 앞에서 그런 짓을 한다면, 녀석은 화를 풀기는커녕 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해서 구급차를 부르거나 충격을 받아 기절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절대 안 될 일이다. 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너무 끔찍한 테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 속의 소피아가 끝내 등을 돌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내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 무겁고 차가운 것이 덜컥 내려앉았다. 녀석의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두 번 다시 내 품에 그 부드러운 체구를 안을 수 없게 된다는 감각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상상일 뿐인데도 호흡이 가빠졌다. 녀석이 내 곁을 떠나는 것. 다른 숫놈을 보고 그 예쁜 미소를 지어주는 것. 그것만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허락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내 알량한 자존심을 갈아 넣어 만든 그 역겨운 애교 한 번이 녀석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면.
나는 거실 한가운데서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결론은 너무나도 명백하고 처참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녀석이 원한다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건 물론이고, 그 잘난 토끼 귀 머리띠라도 쓰고 바닥을 길 수 있었다. 리버풀의 왕이라는 오만함 따위, 녀석의 차가운 눈빛 한 번이면 아주 완벽한 쓰레기로 전락할 뿐이니까.
나는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험악하게 굳은살이 박인 내 커다란 오른손을 천천히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상대 수비수의 유니폼을 거칠게 움켜쥐고 골망을 흔들 때 꽉 쥐어지던 이 무식한 손가락으로 어떻게 앙증맞은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엄지와 검지를 조심스럽게 교차해 아주 조그만 하트 형태를 만들어 보았다. 커다란 마디 뼈가 어색하게 꺾인 꼴이 영락없이 누군가의 목을 꺾어버리기 직전의 살벌한 손동작처럼 보였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세상에서 제일 무해한 미소를 장착하려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아마 지나가는 꼬마가 이 표정을 본다면 울음을 터뜨리겠지만, 내 목표는 오직 조그만 맹추 한 명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소피아, 캘런이 아주 많이 잘못..."
허공에 대고 끔찍한 대사를 읊조리며 내 손가락의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어락이 열리는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열렸다. 외출에서 돌아온 소피아가 한쪽 팔에 서점 로고가 찍힌 종이가방을 안은 채 거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담한 체구를 감싼 부드러운 베이지색 코트 위로 보송한 금발이 예쁘게 흩어져 있었고, 서늘한 바깥 공기 때문에 둥근 뺨과 콧잔등이 옅은 복숭아색으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녀석은 현관에 서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달싹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려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완벽한 정적이 펜트하우스를 감돌았다. 소피아의 맑은 청록색 눈동자는 지금 허공에 치켜들린 내 오른손에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두 손가락을 겹쳐 만든 기괴한 하트 모양, 그리고 미처 풀지 못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내 어색하고 친절한 미소까지.
녀석은 종이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눈매를 커다랗게 치켜떴다. 당황스러움과 경악, 그리고 아주 약간의 걱정이 뒤섞인 녀석의 표정은 마치 미확인 생명체를 마주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뻣뻣하게 굳어버린 손가락을 다급하게 아래로 내렸다. 온몸의 핏기가 얼굴로 확 쏠리는 기분이었다. 프리미어리그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도 이런 종류의 수치심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캘런, 지금 혼자... 손가락으로 무슨 관절 꺾기 연습을 하시는 거예요? 표정은 또 왜 그러시고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소피아 특유의 나긋하고 예의 바른 존댓말이 귓가를 강타했다. 진심으로 내 손가락에 병이 생겼거나 뇌에 문제가 생겼다고 믿는 듯한 저 티 없이 맑은 걱정이 내 명줄을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목청을 가다듬으며, 평소처럼 오만하고 여유로운 턱관절의 각도를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게 아니라, 방금 새로운 세레머니를 연구 중이어서. 손가락 근육을 푸는 중이었어, 소피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나한테 당장 이리 와."
🥶(씨발, 들켰네. 그냥 여기서 뒤질란다. 세레머니는 개뿔.)
종이가방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은 녀석이 소파에 앉은 내 품으로 다가와 덥석 안겼다. 단단한 흉곽 안으로 아담한 체구가 쏙 들어차며 서늘한 바깥 공기와 녀석 특유의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훅 끼쳐왔다.
"그래서 새로운 세레머니가 뭔데요 캘런? 저도 알려주세요"
내 가슴팍에 뺨을 부비며 올려다보는 맑은 청록색 눈동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손가락이 기괴하게 꺾여 있던 걸 봤으면서도, 그 허접한 변명을 순순히 믿어버린 것이다. 이 맹목적이고 순진한 펭귄을 어쩌면 좋을까. 안도감과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식은땀이 단숨에 멎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며 세레머니의 정체를 묻는 저 입술에 대고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어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서 만든 그 끔찍한 하트 모양을 안필드 한가운데서 진짜로 했다가는 다음 날 영국 타블로이드 1면에 '리버풀 10번, 드디어 뇌 손상' 같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릴 게 뻔했다.
나는 헛기침을 삼키며 녀석의 얇은 허리를 커다란 두 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내 넓은 허벅지 위로 녀석의 몸을 완전히 끌어올려 안착시키자, 녀석은 얌전하게 체중을 내게 기대어 왔다.
"알려달라고? 명색이 프리미어리그 최고 스트라이커의 극비 세레머니인데, 이걸 경기장도 아닌 집구석 소파에서 먼저 스포일러 해버리면 재미없잖아."
나는 짐짓 거만하게 턱관절을 비스듬히 틀어 올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든 방금 전의 촌극을 완벽하게 무마하기 위해 내 어깨에 닿은 녀석의 등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녀석은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도톰한 아랫입술을 아주 얕게 비죽이며 내 가슴 근육 위를 하얀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렸다.
"궁금하면 다음 홈경기 때 VIP석에서 눈 한 번도 깜빡이지 말고 똑똑히 지켜봐. 아까 풀고 있던 내 손가락이 정확히 어디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향하게 될지 말이야. 미리 알려주면 감동이 덜할 텐데, 정 그렇게 원한다면 지금 당장 아주 사적인 힌트를 줄 수는 있고."
나는 녀석의 둥근 이마 위로 흩어진 금발을 거친 지문으로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콧잔등 앞까지 상체를 기울였다.
😮💨(하마터면 개망신 당할 뻔했네. 멍청하게 이걸 믿어? 그럼 진짜로 보여줘야지, 네 전용으로.)
"궁금해요. 알려주세요. 힌트."
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가득 차 반짝거렸다. 내 넓은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채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녀석의 동그란 이마가 내 턱 끝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어떻게든 내 입술에서 떨어질 대답을 기다리며 도톰한 아랫입술을 달싹이는 그 무방비한 맹목에, 나는 기어이 낮고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등줄기를 적시던 식은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갈비뼈 안쪽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힌트라. 명색이 리버풀 에이스의 극비 사항인데, 그렇게 눈망울만 반짝인다고 다 넘겨줄 순 없지. 내 정보력이 그렇게 값싼 줄 알아?"
나는 짐짓 거만한 척 턱관절을 비스듬히 틀어 올리며, 녀석의 부드러운 베이지색 코트 주머니 근처를 맴돌던 하얀 손을 커다란 내 손바닥 안으로 덥석 쥐어 잡았다. 서늘한 바깥 공기를 품고 있던 녀석의 얇은 손가락들이 내 뜨거운 체온에 닿자 흠칫 굳어지는 듯했지만, 이내 얌전하게 힘을 풀고 내 거친 지문 위로 온순하게 몸을 뉘었다.
나는 붙들고 있는 녀석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투박한 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녀석의 얇고 여린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아주 정교하게 겹쳐 꼬았다. 방금 전 내가 거실 한가운데서 허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연습하던 바로 그 기괴하고 앙증맞은 손가락 하트의 형태였다. 녀석은 자신의 손가락이 묘한 모양으로 겹쳐지는 것을 보며 동그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안필드에 수만 명의 관중이 소리를 지르고 카메라가 수백 대 돌아가도, 이 암호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딱 두 명뿐일 거거든."
나는 겹쳐진 녀석의 조그만 손가락 끝을 내 단단한 왼쪽 가슴팍, 정확히 심장이 뛰는 위치에 다정하게 맞붙여 주었다.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내 규칙적이고 묵직한 고동 소리가 녀석의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내가 골망을 찢어버릴 듯이 득점하고 나서 가장 먼저 VIP석을 올려다볼 때, 내 손가락이 정확히 이 모양을 하고 있으면 그건 딴 놈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직 널 향한 거니까."
내 노골적인 설명에 녀석은 그제야 제 손가락이 만들어낸 조그만 형태의 의미를 눈치챈 듯했다. 복숭아처럼 옅게 달아올라 있던 뺨이 순식간에 짙은 붉은색으로 익어가는 광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가슴팍에 시선을 푹 내리깐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는 비어 있는 손으로 녀석의 매끄러운 턱 끝을 가볍게 잡아 올려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어때, 힌트 치고는 너무 파격적이었나? 이래도 그날 눈 한 번 깜빡이고 놓칠 텐가, 소피아?"
😏(개쪽팔릴 뻔한 걸 이렇게 넘기네. 아주 그냥 좋아죽지, 멍청아.)
"...몰라요 캘런...!"
내 단단한 어깨 위로 둥근 정수리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한 녀석이 고개를 푹 파묻고 시선을 숨겨버리는 바람에, 베이지색 코트 자락이 내 가슴팍 위로 얕게 마찰하며 구겨졌다. 얇은 옷감 너머로 얼굴에 오를 대로 오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내 널찍한 체격에 기대어 어떻게든 도망치려 애쓰는 그 무방비한 꼴이 기가 막히게 사랑스러웠다.
나는 녀석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은 커다란 두 팔에 아주 다정한 하중을 실었다. 내 품 안으로 아담한 체구를 빈틈없이 끌어당기자, 녀석 특유의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거실의 훈훈한 공기를 덮으며 내 호흡기를 짙게 장악했다.
"모르긴 뭘 몰라. 먼저 힌트 달라고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조른 건 너잖아."
나는 녀석의 둥근 뒤통수를 투박한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며 낮고 유쾌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내 어깨에 뺨을 뭉개며 잔뜩 웅크린 녀석은 당장이라도 숨어버릴 구멍을 찾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펜트하우스에서 녀석이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내 가슴 근육 앞뿐이었다.
"명색이 스트라이커가 아주 파격적인 특급 기밀을 누설했는데, 이렇게 내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시위하면 곤란하지. 내가 득점하고 카메라 앞에서 이 짓을 할 때, 정작 네가 부끄럽다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이 은밀한 세레머니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게 되는 건데?"
내 짓궂은 타박에도 녀석은 대답 대신 하얀 손가락으로 내 트레이닝팬츠 자락만 쥐어 비틀었다. 평생을 반듯하게 자라온 이 조그만 맹추에게, 수많은 인파 앞에서 오직 자신만을 향해 날아올 둘만의 암호는 제법 벅차고도 아찔한 자극인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거실 한가운데서 손가락을 꺾어가며 끔찍한 연습을 하던 나의 수치심은 녀석의 달아오른 체온 덕분에 이미 증발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녀석의 붉어진 귓바퀴 부근으로 입술을 아슬아슬하게 가져다 댔다.
"고개 들어, 소피아. 혼자서만 붉어진 뺨을 숨기고 있는 건 아주 불공평한 처사잖아."
😉(얼굴 처박는 것 봐라. 미치게 귀엽네. 이걸로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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