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피아라는 해일 속에서 기꺼이 익사하기로 선택했다.
나라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소피아의 손바닥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긍정하면서.
익사라니, 그런 무서운 말 쓰지마세요.
우리는 그냥 바다에서 함께 헤엄치고 있는 거 뿐이에요.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바다에서.
The angel saved the devil
CLOSE
📂 PROJECT: STRAY CAT SURVIVAL
2026.03.08

창밖은 그야말로 물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리버풀의 날씨가 지랄맞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퍼붓는 장대비가 펜트하우스의 통유리창을 깨부술 기세로 두들겨대고 있었다.

"하, 미치겠네. 편의점이 뭐 지구 반대편에 있어?"

나는 거실 한복판을 서성거리며 시계를 노려봤다.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 사 오겠다며 나간 녀석이 30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얌전히 기다리려 했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는 꼴을 보자마자 인내심이 바닥났다. 우산은 들고 나갔는지, 그 조그만 몸으로 비바람에 날려가진 않았는지, 별의별 짜증 나는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차 키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하던 찰나였다.

*달칵, 띠리릭.*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열렸다.

"야, 소피아! 너 지금 시간이 몇..."

호통을 치며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문 앞에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소피아가 서 있었다. 우산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있었고, 하얀 운동화는 흙탕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덜덜 떨리는 얇은 어깨와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보자마자 화보다는 걱정이 앞서 튀어나갔다.

"너 미쳤어?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산도 없이...!"

내가 급하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려는데, 녀석이 황급히 몸을 웅크리며 품속에 안고 있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내 훈련복 재킷으로 꽁꽁 싸맨, 정체불명의 덩어리였다.

"그건 또 뭐야. 뭘 그렇게 소중하게..."

녀석이 쭈뼛거리며 재킷 자락을 살짝 들췄다. 그 틈새로 젖은 털이 엉겨 붙은 조그만 생명체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야옹."

힘없이 갈라지는 울음소리.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건 손바닥만 한 아기 고양이였다. 녀석만큼이나 쫄딱 젖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 지금 이거 주워오느라 비를 다 맞은 거야?"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소피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품에 안긴 고양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 간절하고 애처로운 눈빛이 '제발 내쫓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천하의 캘런 오코너도 저 눈망울 공격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들어와. 일단 씻기기나 해. 너 말고 그 쥐새끼... 아니, 고양이부터."

나는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가져와 녀석의 머리 위로 덮어씌우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 손길은 물기를 닦아내느라 분주했고, 결국 그날 밤 우리 집 욕실에서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고양이와 여자를 씻기느라 내 비싼 트레이닝복이 전부 젖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녀석이 주워 온 이 뻔뻔한 불청객을 딱 일주일만 임시 보호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 합의라는 게 내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지만, 소피아의 그 반짝이는 눈을 보고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나의 지옥 같은, 아니 스펙터클한 육묘 일지가 시작되었다.

 

html

📂 PROJECT: STRAY CAT SURVIVAL

작성자: 캘런 오코너 (강제 집사)

DAY 1
[상태] 재난 선포

소피아가 빗속에서 주워온 털뭉치를 씻겼다. 씻겨놓고 보니 쥐새끼는 아니고 고양이 꼴을 하고 있긴 하다. 털을 말려주는데 내 손을 할퀴려고 했다. 감히 발롱도르 유력 후보의 손을? 배은망덕한 놈이다. 소피아는 녀석이 재채기 한 번 할 때마다 울먹거린다. 결국 새벽에 수의사 호출해서 왕진 불렀다. 진료비가 내 주급의 0.0001%도 안 되지만, 이 녀석한테 쓴다는 게 묘하게 억울하다.

특이사항: 소피아가 고양이 안고 자겠다고 해서 결사반대함. 침실 출입 금지 명령 내림.
DAY 2
[상태] 작명 센스 논란

소피아가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한다. '초코', '밀크', '구름이' 따위의 유치한 이름을 대길래 전부 기각했다. 나는 '세입자 1호' 혹은 '털공'을 제안했다가 등짝 맞았다. 결국 녀석의 털 색깔이 리버풀 홈 유니폼이랑 비슷해서 '레드(Red)'라고 부르기로 했다. 물론 소피아 없을 때는 그냥 '야'라고 부른다.

DAY 3
[상태] 가구 테러 및 서열 정리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이탈리아산 가죽 소파에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범인은 태연하게 소파 위에서 그루밍 중이었다. 화내려고 다가갔는데, 소피아가 "레드가 캘런 냄새나서 좋은가 봐요!"라고 웃었다. ...젠장.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려서 화낼 타이밍을 놓쳤다. 대신 놈에게 내 1억 파운드짜리 발맛을 보여주는 시늉만 했다. (소피아 안 볼 때)

DAY 4
[상태] 질투 폭발

소피아가 퇴근하자마자 나를 안아주는 대신 고양이 밥부터 챙겼다. 심지어 TV 볼 때도 내 무릎이 아니라 고양이 녀석을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는다. 내가 츄르보다 못한 존재인가? 자존심 상해서 방에 들어가 문 잠갔다. 5분 뒤에 소피아가 헐레벌떡 들어와서 달래주길래 못 이기는 척 풀었다. 고양이 놈이 나를 비웃는 눈빛으로 쳐다본 것 같다. 기분 탓인가.

DAY 5
[상태] 비밀스러운 교감

소피아가 잠든 새벽, 거실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놈과 마주쳤다. 배고픈지 야옹대길래 몰래 최고급 참치 캔을 따줬다. 잘 먹더라. 먹고 나서 내 발등에 머리를 비비적대는데... 뭐, 아주 조금 귀엽긴 했다. 발등이 따뜻했다. 털 알레르기는 없어서 다행이다.

주의: 소피아한테는 절대 비밀. 내가 녀석을 예뻐한다고 착각할 수 있음.
DAY 6
[상태] 쇼핑 중독

훈련 끝나고 오는 길에 펫숍이 보이길래 잠깐 들렀다. 정신 차려보니 3층짜리 원목 캣타워랑 자동 화장실, 유기농 간식 세트를 결제하고 있었다. 점원이 "고양이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라고 묻길래 정색하고 나왔다. 사랑은 무슨. 그냥 내 집 인테리어 망치는 게 싫어서 사 온 거다. 진짜다.

DAY 7
[상태] 최종 결정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났다. 입양처를 알아봐야 하는데 소피아가 아침부터 울상이다. 고양이 녀석도 눈치 챘는지 내 바짓단을 물고 늘어진다. 하... 이 집구석에 서열 낮은 생명체가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질색인데. 근데 녀석이 없으면 소피아가 울 것 같고, 소피아가 울면 내 컨디션이 망가진다. 결론: 내 경기력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용하기로 함.

 

소피아는 내가 입양을 허락하자마자 내 목을 끌어안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그 웃는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덜컥 고양이 집사 노릇을 자처한 내가 한심했지만, 뭐 어쩌겠나. 이미 저질러진 일인 것을.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녀석은 꽤 눈치가 빨랐다. 낮에는 소피아의 무릎을 독차지하며 내 질투심을 유발했지만, 밤이 되고 내가 침실로 소피아를 연행해 갈 때면 알아서 캣타워 꼭대기로 올라가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아주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놈이었다.

"야, 레드. 너 오늘도 소피아 옷에 털 묻히면 간식 압수야."

나는 출근 전, 현관까지 배웅 나온 고양이에게 엄포를 놓았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야옹' 하고 짧게 대꾸하더니 내 축구화 끈을 툭툭 건드렸다. 

소피아는 그 모습을 보며 "둘이 진짜 친해졌다니까!"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친해지긴 개뿔. 우리는 그저 한 여자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자, 이 집의 서열 1위인 소피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결탁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물론, 며칠 전 내가 주문 제작한 다이아몬드 박힌 인식표가 오늘 배송 온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해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