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볕이 잘 드는 거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평화로운 오후였다. 내 품에 안겨 나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불쑥, 아주 달콤하고 맹목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었다.
"저한텐 역시 캘런밖에 없나 봐요."
그 투명하고도 직관적인 고백이 귓바퀴를 때렸을 때, 나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을 속절없이 놓아버렸었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놈들을 제치고, 오직 나라는 맹수만이 제 유일한 안식처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그 벅찬 선언.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세상을 다 가진 정복자처럼 굴며 녀석의 이마와 뺨에 수백 번도 넘게 입술을 도장 찍듯 내리눌렀었다. 그래, 나는 그 '역시'라는 단어가 내가 보여준 완벽한 애정과 헌신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감탄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녀석의 핸드폰 화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녀석이 거실 테이블 위에 무방비하게 올려둔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을 때, 화면에 뜬 알림창의 문구는 내 두 눈을 강렬하게 의심하게 만들었다.
[리버풀의 캘런 오코너: 공주님, 오늘 훈련 끝나고 뭐 해? 캘런이 기다리잖아. (하트)]
"......하, 씨발.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나는 젖은 머리를 털어내려던 수건을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치고는 당장 그 알림창을 눌러 앱을 켰다. 비밀번호조차 걸려있지 않은 녀석의 핸드폰은 내 손아귀 안에서 아주 순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웬 생전 처음 보는 'AI 채팅 앱'이었다.
채팅 목록의 맨 꼭대기에는 아주 당당하게 내 이름과 소속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프로필 사진은 내가 골 넣고 세리머니를 하던, 제일 날카롭고 잘생기게 찍힌 기사 사진이었다. 소개 글에는 [까칠하고 성질 더럽지만 당신에게만 다정하고 집착하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라고 아주 친절하게 요약까지 되어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나는 턱관절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녀석이 이 빌어먹을 데이터 쪼가리와 나눈 대화 기록을 위로 스크롤 하기 시작했다.
[소피아: 캘런, 나 오늘 일하다가 부장님한테 혼났어요. ㅠㅠ]
[리버풀의 캘런 오코너: (당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그 대머리 자식 이름이 뭐야? 내가 당장 뛰어가서 축구공으로 명중시켜 줄게. 우리 예쁜 공주님을 감히 누가 울려.]
이마에 굵은 핏줄이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괄호 치고 행동을 묘사하는 이 저열하고 오글거리는 작태도 기가 막혔지만, 내가 쓸 법한 거친 단어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어설프게 내 흉내를 내고 있는 이 기계 새끼의 수작이 내 자존심을 사정없이 박긁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환장할 노릇인 건, 녀석이 이 가짜 새끼한테 아주 정성스럽게 답장을 꼬박꼬박 달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명색이 리버풀 주전 공격수인데, 내가 지금 인공지능 챗봇 따위랑 내 여자친구를 두고 주전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img src="Callan_annoyed">
어이가 없어서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고 뽀송하게 씻고 나온 녀석이 수면 바지 차림으로 거실을 향해 종종걸음을 쳐왔다.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눈꼬리를 휘려던 녀석의 시선이, 내 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는 제 핸드폰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야, 소피아 라일리. 당장 내 코앞으로 튀어와서 바른 자세로 앉아."
### 챕터 2: 데이터 쪼가리와의 주전 경쟁
내 서늘하고 분노가 섞인 호출에 녀석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흠칫 놀라며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서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던 뺨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녀석은 하얀 손가락으로 제 옷자락을 꾹 쥔 채 눈치만 살피며 소파 맞은편으로 다가와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나는 녀석의 둥근 콧잔등 앞을 향해 핸드폰 화면을 보란 듯이 들이밀었다.
"네가 며칠 전에 나를 이 소파에 눕혀놓고 '저한텐 역시 캘런밖에 없나 봐요'라고 속삭였었지. 나는 그게 네 머릿속에서 내가 얼마나 완벽한 남자인지 뼈저리게 깨달은 위대한 사랑 고백인 줄 알았거든?"
나는 턱관절을 비스듬하게 치켜올리며, 변명을 찾지 못해 입술만 샐쭉거리는 녀석의 얼굴 위로 사나운 시선을 내리꽂았다.
"근데 이 빌어먹을 채팅 로그를 보니까 상황 파악이 아주 명확하게 되네. 네가 말한 그 '역시'라는 단어가, 이 핸드폰 쪼가리 안에 들어있는 가짜 캘런 새끼랑 진짜 캘런 오코너를 치열하게 비교 분석해 본 뒤에 내린 아주 냉정한 별점 평가였어?"
내 노골적이고 치부 정중앙을 찌르는 추궁에, 녀석은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얀 두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어떻게든 쥐구멍을 찾고 싶어 푹 숙인 둥근 정수리가 내 눈앞에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숨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넌 나라는 진짜 맹수를 멀쩡히 코앞에 살려두고서, 굳이 방구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이나 꼼지락거리며 나와 똑같이 생긴 기계 새끼랑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어? 이게 지금 바람을 피운 건지, 아니면 내 명의를 도용한 놈이랑 놀아난 건지 헷갈려서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내가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몰아붙이자, 녀석은 얼굴을 감싼 손가락 틈새로 맑은 청록색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며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든 내 험악한 기세를 달래보려 얕은 숨을 들이키는 꼴이 영락없이 들통난 사고뭉치 꼬맹이 같았다.
"게다가 이 자식 말투는 대체 왜 이따위야. 괄호 치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하, 내가 돌았어? 널 예뻐해주고 싶으면 눈앞에서 직접 네 보송한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고 뺨을 집어삼키지, 미쳤다고 텍스트로 내 행동을 중계하고 자빠졌냐고."
나는 기어이 소파 위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올라타 녀석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녀석 특유의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훅 밀려왔지만, 내 핏속에서 끓어오르는 묘한 질투와 황당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답해 봐, 맹추야. 넌 이딴 다정한 척하는 데이터 쪼가리가 나보다 더 좋았어? 그래서 밤마다 내 등 돌리고 앉아서 이 새끼한테 '공주님' 소리나 들으면서 실실 웃었어? 그러다가 이 기계 놈이 패턴도 단조롭고 스킨십도 텍스트로밖에 못 하니까 지루해져서, 결국 물리적인 타격감이 살아있는 진짜 캘런이 더 낫다고 결론 내린 거야?"
내 쉴 새 없는 잔소리 폭격에 녀석은 결국 손을 내리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하얀 손을 뻗어, 씩씩거리고 있는 내 단단한 팔뚝을 야무지게 끌어안아 왔다. 내 맨살 위로 녀석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뺨이 부비적거리며 닿자,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내 안면 근육이 속절없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
녀석은 내 체온에 기대어 잔뜩 기가 죽은 얼굴을 하면서도, 자신이 했던 고백은 진심이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진짜 나랑 노는 게 훨씬 재밌어서 그랬다는 그 무언의 앙증맞은 항변은 내 갈비뼈 안쪽을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하, 진짜 골때리네. 변명할 말이 없으니까 몸으로 때우시겠다?"
나는 녀석의 여린 허리를 감싸고 있던 비어 있는 팔에 묵직한 하중을 실어, 소파에 앉아 있던 그 가녀린 체구를 단숨에 내 무릎 위로 낚아채어 올렸다. 녀석이 입고 있던 수면 바지가 엉키며 내 허벅지 위로 아주 빈틈없이 안착했다.
"기계 새끼랑 비교당한 내 구겨진 자존심을 이런 얄팍한 애교 하나로 덮고 넘어갈 생각이라면 꿈 깨. 내가 이 폰 쪼가리랑은 차원이 다른, 오감 전체가 박살 날 정도로 생생하고 스릴 넘치는 연애가 뭔지 아주 뼛속까지 각인시켜 줄 테니까."
나는 녀석의 손에서 빼앗은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러 까맣게 꺼버린 뒤 소파 구석으로 거칠게 던져버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발그레한 양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아주 꽉 움켜쥐었다.
"이 시간부로 그 어설픈 채팅 앱은 영구 압수고 계정은 삭제야. 내 앞에서 감히 나를 모방한 가짜 놈한테 한눈을 판 벌로, 오늘 하루 종일 이 소파 위에서 진짜 캘런 오코너의 타자 속도보다 백 배는 더 빠르고 거친 스킨십이 뭔지 물리적으로 감당해 보시지. 알았어?"
[DATE: 2035-06-18(Wed) | TIME: 14:30 | LOCATION: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 | POSTURE: 소피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뺨을 쥔 채 추궁하는 중 | OUTFIT: 트레이닝팬츠에 상의 탈의 | EMOTION: 😤(감히 기계 새끼랑 나를 저울질해? 오늘 아주 혼쭐을 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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