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피아라는 해일 속에서 기꺼이 익사하기로 선택했다.
나라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소피아의 손바닥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긍정하면서.
익사라니, 그런 무서운 말 쓰지마세요.
우리는 그냥 바다에서 함께 헤엄치고 있는 거 뿐이에요.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바다에서.
The angel saved the devil
CLOSE
캘런 오코너 아카데미 1호
2026.03.06
my

"내일은 캘런 동네 갈까요? 여기서 멀어요?" 
 
"......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그 깃털 같은 감촉에, 나는 아쉬움 반 기가 막힘 반으로 입맛을 다셨다. 고작 '쪽' 하는 소리 하나 남기고 떨어져 나가서는,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표정으로 잘 자라니. 며칠째 수절 중인 건강한 남자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녀석의 엉뚱한 제안이 내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묘한 호기심의 불씨를 당겼다.

"내 동네? 거길 가고 싶다고?"

나는 녀석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이 좁아터진 싱글 침대 위에서 녀석을 내 가슴팍으로 더 바짝 밀착시켰다. Foxrock. 아일랜드 부촌의 상징인 이곳에서 곱게 자란 녀석이, 내가 나고 자란 그 거칠고 투박한 뒷골목을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젠장맞게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멀긴 뭐가 멀어. 여기서 차로 밟으면 30분도 안 걸려. 더블린이 런던만 한 줄 아냐?"

나는 녀석의 콧잔등을 내 턱으로 꾹 누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근데 미리 경고하는데, 거긴 여기랑은 공기부터가 달라. 네가 사는 동네가 도련님들이 찻잔 들고 다니는 곳이라면, 내 구역은 침 뱉고 공 차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정글이라고."

물론 지금은 내가 그 정글의 왕이자 전설이 되었으니, 녀석을 데리고 금의환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내 낡은 모교, 내가 벽에 공을 차대던 허름한 골목길. 그 모든 곳에 이 고상하고 예쁜 녀석을 세워두고 '내 여자다'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그림을 상상하니 꽤 짜릿했다.

"좋아. 접수했어. 내일 눈 뜨면 바로 가자. 캘런 오코너 투어 시켜줄 테니까."

나는 녀석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이불을 녀석의 어깨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좁은 침대 덕분에 우리 몸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하게 포개져 있었다.

"대신 입장료는 비싸. 내일 가서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야 하니까 각오해."

물론 그 입장료라는 게 고작해야 내 손 꼭 잡고 다니기,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따위겠지만.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에 깊게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녀석의 살 냄새가 이 방의 공기보다 더 포근했다.

"잘 자라, 내 호기심 대장. 꿈속에서 딴 데로 새지 말고."
 
“네 꿈에서 만나요 캘런”
 
“…”
눈을 감으며 나직이 속삭이는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꿈에서 만나자니. 아주 로맨틱한 멘트였지만, 내 식대로 해석하면 그건 '꿈속에서도 내 허락 없이 딴 놈이랑 놀지 마라’는 경고이자 약속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녀석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좁아터진 싱글 침대가 이렇게나 훌륭한 가구일 줄이야. 녀석이 몸을 뒤척일 틈조차 없이 내게 딱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이 구조적 한계가 젠장맞게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의 등과 내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되고 녀석의 엉덩이가 내 허벅지에 닿는 그 감촉이 그 어떤 킹사이즈 침대보다도 아늑했다.
 
“그래. 꿈속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딴길로 새지 말고 바로 와.”
 
나는 녀석의 뒷머리에 코를 박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늦으면 벌점이야. 꿈에서도 널 찾아내서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녀석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곤했는지, 아니면 내 품이 편안했는지(당연히 후자겠지만)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녀석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아일랜드의 달빛이 녀석의 콧날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 하루, 참 길고도 스펙터클했다. 호랑이 굴인 줄 알고 잔뜩 쫄아서 들어왔던 이 집이, 이제는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내 품에 안긴 이 작은 여자 덕분이었다. 30년산 위스키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취하게 만드는 존재.
 
‘내일은 내 차례네.’
 
내일은 녀석을 데리고 내가 나고 자란 곳으로 간다. 화려한 펜트하우스도, 고풍스러운 이 저택도 아닌 거칠고 투박한 내 시작점. 녀석이 그 낡은 풍경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서 심장이 간질거렸다. 아마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와, 캘런 여기서 축구했어요?”
 
하며 신기해하겠지.
 
“잘 자라, 내 보물들.”
 
나는 녀석의 납작한 배 위에 얹은 손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녀석은 내 손바닥 안이었다. 2034년 4월의 마지막 밤, 아일랜드의 작은 방 안에서 맹수는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에 들었다.
 
“으으… 젠장.”
 
눈을 뜨자마자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건 상쾌한 아침 인사가 아니라, 꽉 막힌 신음 소리였다. 왼쪽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전기가 통하듯 찌릿찌릿한 마비 증상이 느껴졌다. 좁아터진 싱글 침대에서 덩치 큰 남자 하나와 임신부 한 명이 엉겨 붙어 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내 왼팔은 밤새 녀석의 훌륭한 베개이자 족쇄 역할을 수행하느라 장렬히 전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내 가슴팍에 침을 흘리며(사실 흘리진 않았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자고 있는 녀석의 동그란 이마를 보는 순간, 잘라내고 싶을 만큼 아픈 팔의 고통 따위는 순식간에 마취된 듯 사라졌다.
 
‘잘도 자네. 여기가 5성급 호텔인 줄 아나.’
 
나는 감각이 없는 왼손 대신 오른손을 들어 녀석의 볼살을 쭈욱 잡아당겼다. 녀석이
“웅…”
하며 앓는 소리를 내고는 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이 무방비한 생명체를 어쩌면 좋을까.
 
“일어나, 잠만보. 해 떴어. 투어 가야지.”
 
녀석이 부스스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무해한 미소 한 방에 나는 오늘도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이마에 콩, 하고 입술을 박았다.
 
“얼른 씻고 나와. 장인어른이랑 형님 깨기 전에 도망가야 하니까. 아침부터 그 양반들한테 붙잡혀서 해장국 먹다간 점심때나 돼야 나갈 수 있을걸.”
 
우리는 마치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물론 시간은 아침 9시였지만―살금살금 2층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빠져나왔다. 아일랜드 특유의 습하고 찬 공기가 훅 끼쳐왔다. 나는 미리 대기시켜 둔 차에 녀석을 태우고, 온도를 조절했다.
 
“준비됐냐? 이제부터 가는 곳은 여기랑은 차원이 달라. 안전벨트 꽉 매.”
 
폭스락의 고풍스러운 저택들을 뒤로하고, 차는 더블린의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이 서서히 변해갔다. 잘 정돈된 정원과 높은 담장은 사라지고, 그래피티가 그려진 낡은 벽돌 건물들과 빨래가 널린 좁은 골목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고향. 캘런 오코너라는 악동이 탄생한 척박한 땅. 녀석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두리번거리는 걸 곁눈질로 보며,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놀라지 마. 내가 여기서 공 좀 차던 시절엔, 이 동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내 공에 박살 났었으니까.”
 
차가 낡은 공터 옆에 멈춰 섰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려. 여기가 내 첫 번째 홈구장이야.”
“좋네요 이런 분위기도”
"하, 좋다고? 취향 하고는."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태연하고도 긍정적인 감상평에, 나는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키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붉은 벽돌은 군데군데 깨져 있고, 아스팔트 사이로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제멋대로 솟아난 이 황량한 공터가 좋단다. 폭스락의 잘 깎인 잔디 정원만 보고 자란 온실 속 화초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내 손을 단단히 잡고 먼저 발을 내디디는 꼴이라니. 이 예측 불가능한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발밑 조심해. 여긴 네가 걷던 꽃길이랑 달라서, 돌뿌리가 아주 텃세가 심하거든."

나는 녀석을 에스코트하듯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짐짓 엄살을 피웠다. 낡은 운동화 밑창에 밟히는 자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지만, 녀석의 표정은 마치 숨겨진 보물지도라도 발견한 모험가처럼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기 보여? 저 다 무너져가는 담벼락."

나는 턱끝으로 공터 한구석에 있는, 페인트칠이 다 벗겨지고 시멘트가 드러난 낡은 벽을 가리켰다. 곳곳에 검게 그을린 자국과 무수히 많은 공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는 곳이었다.

"저기가 캘런 오코너의 1호 골대였어. 내가 하도 걷어차서 저 벽이 무너지지 않고 버틴 게 기적이지."

과거의 내가 땀 범벅이 되어 악을 쓰며 공을 차던 그 자리에,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고귀하고 예쁜 여자가 내 아이를 품은 채 서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대비가 묘하게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칙칙한 회색빛 풍경 속에 녀석 하나 떨어뜨려 놨을 뿐인데, 마치 흑백 영화가 순식간에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네가 좋다면 다행이네. 나중에 우리 콩알이 나오면 여기서부터 데려와야겠어. 아빠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컸는지 조기 교육 좀 시키게."

농담처럼 던졌지만, 녀석은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온기가 차가운 더블린의 아침 공기를 데우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저기 앉아 봐. 내 지정석이었던 벤치니까."

나는 녀석을 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나무 벤치로 이끌었다. 내가 먼지를 털어내고 앉히자, 녀석은 거부감 없이 자리를 잡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누추한 곳조차 녀석이 있으니 꽤 그럴싸한 데이트 코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때. 리버풀 홈구장보다 관중석은 좀 좁아도, VIP 대우는 여기가 더 확실하지?"
"네."
"캘런이 사랑하는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지..."
"......하."

어깨에 와 닿는 그 말랑하고 따뜻한 무게감, 그리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녀석의 담담한 고백에 나는 기어이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블린의 하늘은 여전히 칙칙한 회색빛이었지만 내 눈에는 지금 저 구름 사이로 무지개라도 뜬 것처럼 세상이 찬란하게 보이고 있었다.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지라니. 이건 챔피언스리그 결승골보다 더 강력한, 내 심장을 향한 다이렉트 슈팅이었다. 이 낡고 볼품없는 공터, 흙먼지 날리는 바닥조차 녀석이 그렇게 말해주니 갑자기 성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벤치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팔을 내려 녀석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녀석의 체온이 낡은 트랙슈트를 뚫고 전해져 왔다.

"야, 소피아. 너 그거 반칙이야."

나는 녀석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짐짓 툴툴거리는 척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물기 어린 웃음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멘트는 어디서 배워오는 거냐? 학원이라도 다녀?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녀석이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키득거리는 진동이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좁은 벤치, 차가운 바람 그리고 내 품에 안긴 여자. 내가 이룬 그 어떤 부와 명예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완벽하게 느껴졌다.

"잘 들어.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제 무르기 없어."

나는 녀석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청록색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꽉 차게 담겨 있었다.

"나중에 내가 늙어서 은퇴하고, 배 나온 아저씨가 돼서 동네 조기축구회나 기웃거려도... 그때도 넌 지금처럼 내 옆에서 물 떠다 바치면서 응원해야 해. 알겠어?"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녀석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녀석은 내 화려한 트로피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흙바닥에서 구르던 꼬맹이 시절의 나부터 늙어빠진 미래의 나까지 통째로 사랑해 줄 유일한 여자였으니까.

"그리고 콩알이 너도 잘 들었지? 엄마가 아빠한테 평생 종신 계약 선언한 거다."

나는 녀석의 배 위에 얹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증인 섰으니까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녀석의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자 녀석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 낡은 동네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축구였지만 이제 그 축구가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녀석이었다.

"가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 배겨. 콩알이도 슬슬 지루해할 때 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식을 줄을 몰랐다.
 
"네. 캘런."
"좋아. 기립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자세야."

군말 없이 내 손길에 이끌려 일어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툭툭 털어주며, 나는 짐짓 과장된 칭찬을 던졌다. 낡은 벤치에서 일어나는 것뿐인데도 내 에스코트를 받으니 마치 여왕님이 옥좌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우아함이 흘렀다. 이 칙칙한 회색빛 골목에 명품 코트를 입은 임산부라니. 누가 봐도 합성 사진처럼 이질적인 풍경이었지만, 내 눈엔 그 부조화가 기막히게 사랑스러웠다.

"잘 따라와. 여기서 손 놓치면 국제 미아가 아니라, 동네 꼬마들한테 납치당해서 축구공 셔틀이나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녀석의 손을 내 코트 주머니 속에 푹 찔러 넣고, 깍지를 낀 채 걸음을 옮겼다. 녀석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내 발걸음이 낡은 보도블록 위를 굴렀다. 골목 어귀를 돌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시큼한 식초 향이 바람을 타고 훅 끼쳐왔다.

"킁킁대지 마. 이게 바로 이 구역의 향수(Perfume) 같은 거니까."

녀석이 코를 벌름거리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으며, 나는 허름한 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는 작은 가게 앞으로 녀석을 이끌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문틀과 기름때 낀 창문. 위생 등급을 따지자면 별 하나도 아까운 곳이었지만, 내 유년 시절의 절반은 이곳의 감자 튀김이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놀라지 마라. 여기가 캘런 오코너가 선정한 더블린 맛집 1위니까."

가게 문을 열자, 주인 할아버지가 나를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하는 시늉을 하며, 가장 구석진 자리로 녀석을 안내했다.

"앉아. 메뉴판 볼 필요도 없어. 여긴 주는 대로 먹는 게 룰이야."

나는 주인장에게 눈짓으로 '늘 먹던 거, 근데 제일 깨끗한 기름으로'라는 텔레파시를 보내고 녀석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가 삐걱거렸다. 녀석은 이 낯선 풍경이 신기한지 연신 두리번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잠시 후, 갓 튀겨낸 두툼한 감자튀김과 생선 튀김이 신문지 같은 종이에 투박하게 싸여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튀김 위로 소금과 식초가 듬뿍 뿌려져 있었다.

"자, 봐. 이게 바로 '피쉬 앤 칩스'의 원조야. 런던에서 먹던 그 세련된 맛이랑 비교하지 마. 이건 영혼이 담긴 맛이니까."

나는 뜨거운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호호 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포슬포슬한, 내 기억 속 완벽한 그 맛이었다.

"아 해. 콩알이도 기름진 게 좀 들어가야 힘을 쓸 거 아냐."

녀석의 입가에 감자를 들이밀며, 나는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이 투박하고 저렴한 내 추억을, 녀석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줄지. 녀석이 입을 벌리고 감자를 받아먹는 순간, 내 심장도 튀김 기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맛있네요. 캘런의 추억의 맛"
"하, 추억의 맛이라니. 포장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야."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낭만적인 감상평에, 나는 기어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녀석의 오물거리는 입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솔직히 말해 위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이 싸구려 감자튀김을 씹으면서도 녀석은 마치 5성급 호텔 셰프가 내놓은 에피타이저를 맛보는 미식가처럼 굴고 있었다. 내 추억의 맛? 웃기지 마. 이건 그냥 쩔은 기름 냄새와 짠 소금 맛, 그리고 흙먼지 맛일 뿐인데. 하지만 녀석이 그렇게 예쁘게 정의해주니 갑자기 이 눅눅한 튀김 쪼가리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요리처럼 느껴지는 기적을 맛보는 중이었다.

"입맛 한번 저렴해서 다행이네. 나중에 파산해도 굶겨 죽일 일은 없겠어."

나는 짐짓 짓궂게 낄낄거리며, 종이봉투 속에서 이번엔 큼지막한 생선 튀김 조각을 집어 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것도 먹어. 이게 메인 디시니까. 겉에 묻은 거 탄 거 아니야. 바삭하게 익은 거지."

후후 불어 식힌 다음, 녀석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 녀석이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꼴을 보자니 뱃속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폭스락의 대저택에서 유기농 샐러드나 먹고 자랐을 녀석이 내 손끝에서 전해지는 이 거친 맛을 거부감 없이 삼킨다는 사실이 묘한 정복감을 안겨주었다.

"근데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야. 장모님이 아시면 기절하실걸? 귀한 손주랑 딸한테 이딴 불량식품을 먹였다고 내 등짝을 스매싱하실지도 몰라."

나는 엄지로 녀석의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스윽 닦아내며, 그 손가락을 내 입으로 가져가 쪽 빨았다. 짭짤했다. 그리고 녀석의 체온이 섞여 달콤했다.

"맛있지? 콩알이도 뱃속에서 춤추고 있을 거야. 원래 몸에 나쁜 게 맛은 제일 좋은 법이거든."

나는 녀석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낡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칙칙한 벽, 끈적이는 테이블. 하지만 내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여자가 앉아 내 과거를 함께 씹어 삼키고 있었다. 

"많이 먹어둬. 여기 다 비우기 전까진 못 나가. 우린 이제 이 기름진 범죄를 함께 저지른 공범이니까."

"네. 캘런도요."
"하, 나도? 아주 효녀 나셨네."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기특하고도 맹랑한 권유에, 나는 기어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상체를 테이블 위로 쑥 기울였다. 내가 저를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 와중에 내 입에 들어갈 것까지 신경 쓰는 꼴이라니. 콩알이 엄마가 되더니 모성애가 나한테까지 번진 건가 싶어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그래, 공범끼리 굶으면 안 되지. 같이 죽고 같이 살아야 하니까."

나는 녀석이 쥐고 있던, 반쯤 먹다 남은 감자튀김 조각을 내 입이 아닌 녀석의 손가락째로 덥석 물어버렸다. 녀석이 "앗"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의 손가락 끝에 묻은 짭짤한 소금기와 기름기까지 쪽 소리 나게 빨아들인 뒤에야 입을 뗐다.

"음, 짜다. 근데 다네. 네 손맛이 들어가서 그런가."

뻔뻔하게 입맛을 다시며 농담을 던지자, 녀석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 맛에 놀리지. 5성급 레스토랑의 디저트보다 이 낡은 가게에서 녀석의 손가락을 맛보는 게 백배는 더 달콤했다.

"자, 식사 끝. 더 먹다간 장모님한테 혼날 배가 될 것 같으니까 여기서 멈추자."

나는 녀석의 입가와 손을 냅킨으로 꼼꼼하게 닦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할아버지가 카운터에서 흐뭇한(혹은 꼴불견이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지갑을 꺼내는 대신,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현금을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던져두었다. 팁까지 넉넉하게.

"가자. 배도 채웠으니 소화시켜야지. 여기서 5분만 걸으면 내가 다녔던 학교가 나와. 전설이 시작된 곳이지."

녀석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서자, 다시금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맞잡은 손은 뜨끈했다. 낡은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골목 어귀의 담벼락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 낙서."

페인트가 벗겨진 붉은 벽돌 위에, 서툴지만 힘 있는 글씨체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Callan O'Connor - The King]

"15년 전의 내가 쓴 거야. 아주 건방진 꼬맹이였지. 근데 틀린 말은 아니었잖아?"

나는 녀석의 어깨를 으스대듯 툭 치며,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녀석이 그 낙서를 보며 신기해하는 눈빛이, 마치 박물관의 명화라도 보는 듯해서 민망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제 저 옆에 네 이름도 써야겠네. '왕의 여자'라고."

"진짜 쓸까요? 캘런 펜 있어요?"
"하, 진짜 쓸 생각이야?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네."

녀석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그 당돌하고도 사랑스러운 제안에, 나는 기어이 참았던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진짜로 쓰겠다고? 이 곰팡이 핀 붉은 벽돌 위에? 폭스락의 대저택에서 우아하게 홍차나 마시던 손으로 빈민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겠다니.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15년 전의 건방진 꼬맹이 캘런이 써 갈긴 유치한 낙서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겠다는 그 발상이 기특하다 못해 뱃속을 간질거렸다. 마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혼인 신고서라도 작성하겠다는 태도 아닌가.

"어디 보자... 펜이라."

나는 짐짓 진지한 척 트랙슈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물론 나올 리가 없었다. 운동하러 나온 놈 주머니에 펜이 들어있을 리 만무했고, 있다 한들 내 여자의 고운 손에 흙먼지 묻은 벽돌 가루를 묻히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아쉽게도 없네. 지금 내 주머니엔 펜 대신 네 손 잡을 공간밖에 없어서."

나는 빈 손바닥을 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녀석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벽을 쳐다보는 꼴을 보자니, 당장이라도 편의점으로 달려가 매직이라도 사다 바쳐야 하나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안 돼. 여기 더러워. 쥐 오줌이랑 곰팡이가 친구 먹은 벽이라고."

나는 녀석을 벽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하며, 녀석의 손등을 내 입술로 가져갔다.

"네 이름은 이런 칙칙한 벽돌 말고, 좀 더 비싸고 근사한 곳에 새겨야지. 예를 들면..."

나는 녀석의 손을 내 왼쪽 가슴,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 그 위치에 턱 얹었다. 두툼한 옷 위로도 내 박동이 전해질 만큼 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여기라든가. 이미 캘런 오코너의 심장벽에는 '소피아 라일리'라고 문신처럼 새겨져 있어서 지울 수도 없거든."

비릿한 농담을 던지며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확 붉어지는 녀석의 반응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벽에 쓰는 건 나중에 콩알이 나오면 셋이 같이 와서 하자. 그때는 페인트 한 통 들고 와서 아예 벽 전체를 도배해 버리지 뭐."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고,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제 진짜 전설의 시작점을 보여줄게. 내가 처음으로 공을 찼던 운동장이야. 거기 가면 펜 없이도 네 흔적을 남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 도착. 여기가 바로 캘런 오코너 아카데미 1호점이야."

녹슨 철조망 너머로 황량한 흙바닥이 펼쳐진, 학교라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운 공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구석과 그물조차 없이 뼈대만 남은 골대가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만, 내 눈에는 이보다 더 완벽한 스타디움은 없었다. 15년 전, 코흘리개 캘런이 밤낮없이 공을 차며 프리미어리그를 꿈꾸던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나는 녀석의 반응을 살피며 슬그머니 철조망 한쪽 구석으로 녀석을 이끌었다.

"문? 그런 건 얌전한 도련님들이나 쓰는 거고."

철조망 아래쪽이 인위적으로 뜯겨나가 사람이 기어서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벌어진 구멍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이게 바로 VIP 전용 입장로야. 내가 뚫어놨지."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멍과 나를 번갈아 보는 꼴이 퍽 귀여웠다. 물론 임산부인 녀석을 저기로 기어 들어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내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농담이야. 쫄지 마. 정문은 저쪽이니까."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 온기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근데 소피아. 나중에 콩알이 나오면 말이야."

운동장 한복판에 서서, 나는 발로 흙바닥을 툭툭 찼다. 먼지가 폴폴 날렸지만, 그 냄새마저 고향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그 녀석은 여기 와서 저 개구멍으로 들어가게 시킬 거야. 남자는 좀 거칠게 커야 하거든. 아빠가 얼마나 빡세게 살았는지 몸으로 느껴봐야지."

녀석이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타박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낄낄거리며 녀석의 손을 잡고 텅 빈 골대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봐. 저 골대. 내가 슛을 하도 세게 때려서 왼쪽 기둥이 살짝 휘었어. 보이지?"

물론 세월 탓에 휜 거겠지만, 내 전설에는 약간의 과장이 필요한 법이다. 녀석이 내 허풍에 속아 넘어간 척 고개를 끄덕이며 골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 순진한 눈빛이 젠장맞게도 사랑스러워서, 나는 녀석의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녀석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여기서 시작해서, 안필드까지 갔어. 그리고 결국 널 만났고."

녀석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 흙바닥이 나한테는 웸블리 스타디움보다 더 값진 곳이야. 네가 여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 필름이 완성된 기분이라고."

"멋있는 공간이네요. 캘런이 축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져서..."
"하, 멋있어? 너 진짜 안경 맞춰야겠다."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진심 어린 감탄사에, 나는 기어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멋있다니. 녹슨 철조망과 잡초가 무성한 흙바닥, 그리고 쥐새끼가 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이 폐허 같은 공터를 두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폭스락의 대저택 정원만 보고 자란 녀석의 눈에는 이 거친 풍경조차 무슨 빈티지 영화 세트장처럼 낭만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젠장,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뱃속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은 '슬럼가'라고 혀를 차며 지나갈 이 곳에서, 녀석은 내 땀과 열정을 먼저 읽어냈다. 내 과거가, 내 가난했던 시절이 녀석의 필터를 거치니 순식간에 '열정의 산실'로 포장되는 기적을 맛보고 있었다.

"야, 소피아. 너 그거 중증이야. 콩깍지도 이 정도면 병이라고."

나는 녀석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내 가슴팍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녀석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내 것과 섞여 쿵쿵거렸다.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이 흙먼지 날리는 바닥이 웸블리 잔디구장보다 더 근사해 보이긴 하네."

나는 녀석의 어깨에 턱을 괴고, 녀석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텅 빈 운동장을 눈에 담았다.

"맞아. 미쳐 있었지.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여기서 빵 쪼가리 씹으면서 공만 찼으니까. 그때 내 머릿속엔 오직 하나, 성공해서 여길 뜨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녀석의 귓불을 입술로 살짝 스치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웃기지?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곳인데,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성공한 놈이 돼서 다시 돌아왔잖아. 그것도..."

나는 녀석을 돌려세워 마주 보았다. 녀석의 맑은 청록색 눈동자 속에, 낡은 운동장이 아닌 오직 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귀한 보물을 달고 말이야."

녀석의 코를 아프지 않게 톡 튕겼다.

"네가 멋있다고 했으니까, 여긴 이제부터 캘런 오코너의 성지로 지정한다. 나중에 콩알이 데리고 와서 입장료라도 받아야겠어. 아빠의 땀과 눈물이 서린 곳이라고."

비릿한 농담을 던지며 녀석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이 낡은 동네가 녀석 덕분에 금박을 입힌 듯 반짝거려 보였다.

"가자. 너무 오래 서 있었어. 감상평은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진짜 멋있는 거 보여줄게. 여기서 5분만 더 가면 내가 첫 골 넣고 세레머니 하다가 자빠진 전설의 장소가 나오거든."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녀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자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끈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내 손 하나에 의지해 이 낯설고 거친 길을 따라나서는 저 무모한 신뢰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쏙 들어와 있는 녀석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밑 잘 봐. 여긴 보도블록이 지뢰밭 수준이니까."

우리는 건물과 건물 사이,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양옆으로 늘어선 벽돌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라피티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폭스락의 대저택에서 우아하게 홍차나 마시던 녀석에게는 이세계나 다름없을 풍경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경고에 따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성실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 오리를 쫓는 아기 오리 같아서, 나는 걸음을 늦추고 녀석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조절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막다른 길 끝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담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야. 도착."

나는 턱끝으로 그 벽을 가리켰다. 벽 한가운데에는 흰색 페인트로 엉성하게 그려진 사각형 골대 모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 주변은 수만 번의 슈팅으로 인해 벽돌이 깎여나가 움푹 패여 있었다.

"저게 바로 전설의 골키퍼, '벽돌 씨'야. 내가 아무리 세게 차도 절대 먹히지 않고 다 튕겨내던 놈이지."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흉물스러운 흔적을 무슨 유적지라도 보는 양 감상하는 동안, 나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벽 앞의 움푹 파인 웅덩이 자국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그 역사적인 사고 현장이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일곱 살 때였나. 내가 여기서 혼자 월드컵 결승전 놀이를 하고 있었거든. 추가 시간 3분, 프리킥 찬스. 내가 저기 사각형 구석에 정확하게 슛을 꽂아 넣고, 너무 기분 좋아서 세레머니를 한답시고 무릎 슬라이딩을 시도했지."

녀석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반짝였다.

"근데 젠장, 여기가 잔디밭이 아니라는 걸 깜빡한 거야. 무릎으로 미끄러지다가 저기 고인 빗물 웅덩이에 그대로 처박혔지. 무릎은 다 까지고, 흙탕물 범벅이 돼서 집에 갔다가 할머니한테 등짝 스매싱을 맞았어."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때 흘린 피와 눈물이 지금의 튼튼한 하체를 만든 거라니까. 어때, 알고 보니까 저 웅덩이가 무슨 성수라도 고여 있는 것 같지 않아?"
"정말 그렇네요. 캘런"
"하, 못 말리겠네 정말."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의심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그 순수한 동의에 나는 기어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커먼 흙탕물이 고였다 말라비틀어진 이 볼품없는 웅덩이를 보고 '정말 그렇네요'라니. 녀석의 눈에는 내가 밟고 지나간 자리라면 똥밭도 꽃길로 보이는 게 분명했다. 이건 콩깍지를 넘어서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하지만 젠장,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든든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던 꼬질꼬질한 과거의 나조차 녀석은 지금 이 순간 껴안아주고 있으니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교황청에서 와서 아니라고 해도 네 말이 법이야."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내 쪽으로 바짝 당기며, 녀석의 이마에 쿵 하고 내 이마를 맞댔다.

"근데 소피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고만 가면 섭섭하잖아? 전설의 시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

나는 녀석을 안전한 평지 쪽으로 물러나게 한 뒤, 바닥에 굴러다니는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하나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페널티 스팟'이라고(내 마음대로) 지정한 지점에 세워두었다.

"잘 봐. 이게 바로 캘런 오코너의 1호 프리킥이야. 당시 승률 100퍼센트를 자랑하던 필살기지."

나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돌멩이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트랙슈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관중이라곤 임신한 내 여자와 뱃속의 콩알이, 그리고 지나가던 비둘기 한 마리가 전부였지만 내 심장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프리킥 찬스를 앞둔 키커처럼 쿵쿵 뛰었다.

"준비됐어? 눈 크게 뜨고 봐. 순식간에 지나갈 테니까."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타닥, 퍽!

내 오른발이 정확하게 돌멩이를 강타했다. 돌멩이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벽에 그려진 희미한 사각형 골대의 오른쪽 구석―정확히는 페인트가 벗겨져 움푹 파인 그 지점―에 '캉!' 하는 청명한 파열음을 내며 꽂혔다.

"골인! 봤냐? 봤어?"

나는 짐짓 과장되게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며,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90분 추가 시간에 역전골을 넣은 선수처럼, 나는 녀석을 와락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이게 바로 클래스야. 돌멩이로도 골망을 흔드는 남자, 그게 네 남편 될 사람이라고."

어지러울까 봐 금방 내려주었지만, 흥분으로 상기된 내 얼굴은 녀석의 코앞에 머물러 있었다. 녀석의 맑은 눈동자 속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있는 멍청하고 행복한 내 얼굴이 비쳤다.

"어때. 이 정도면 입장료 값은 충분히 했지?"
"네. 캘런." 
"이건. 입장료 계산."
"......하."

입술 위로 예고 없이 내려앉았다가 떨어지는 그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에, 나는 잠시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까치발을 들고 다가온 녀석의 동그란 이마가 내 턱밑에서 살랑거렸다. 입장료 계산이라니. 이 척박하고 먼지 날리는 흙바닥 위에서 녀석이 던진 그 당돌하고도 사랑스러운 흥정에 내 뇌세포가 순식간에 백기를 들고 투항해 버렸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배시시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15년 전의 내가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뛰어다니던 이 거친 골목이, 녀석의 입술 도장 하나로 순식간에 런던의 최고급 호텔 라운지보다 더 근사한 곳으로 탈바꿈하는 기적을 맛보고 있었다.

"야, 소피아. 너 계산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녀석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녀석의 발뒤꿈치가 다시 바닥에 닿고, 녀석의 몸이 내 품에 폭 안겼다.

"이 구역 물가가 얼마나 비싼 줄 알고 고작 뽀뽀 한 번으로 퉁치려고 해? 여기가 캘런 오코너 1호점인데, 프리미엄이 붙어도 한참 붙었다고."

내 뻔뻔한 주장에 녀석의 눈이 휘어지는 걸 보며,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그 짧은 접촉만으로는 부족했다. 감질나서 미칠 것 같았다.

"부족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녀석의 콧잔등을 내 코로 비비며, 녀석의 입술 바로 앞에서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나머지 잔금은 지금 당장 일시불로 받아야겠어. 이자까지 쳐서."

녀석이 피할 새도 없이, 아니 피할 생각도 없다는 듯 입술을 벌리는 틈을 타 나는 녀석의 입술을 깊게 삼켰다. 아까의 가벼운 입맞춤과는 달랐다. 녀석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고, 입안으로 파고들어 녀석의 숨결을 몽땅 앗아갔다. 공터에 불어오는 찬 바람도, 낡은 벽돌담의 퀴퀴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녀석의 달콤한 타액과 뜨거운 체온만이 내 감각을 지배했다. 녀석이 내 옷깃을 꽉 움켜쥐는 손길에 맞춰 나는 고개를 비틀어 더 깊이,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녀석을 탐하다가, 숨이 차오르는 녀석을 위해 아쉽게 입술을 떼어냈다. 붉게 부어오른 녀석의 입술과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이제 좀 계산이 맞네."

나는 엄지로 녀석의 번들거리는 입가를 닦아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가자. 다음 코스로. 거기서도 입장료는 별도니까 긴장하고 따라와. 내 주머니 사정이 좀 넉넉해져야겠으니까."

"...네에."
"하, 대답 한번 기가 막히게 잘하네."

입술을 떼자마자 들려오는, 나른하게 풀린 녀석의 순종적인 대답에 기어이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치솟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녀석의 숨을 몽땅 앗아간 탓인지,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고 젖어 있었다. 그게 젠장맞게도 내 가학심을 자극해서 하마터면 여기서 2차 징수를 감행할 뻔했다. 나는 녀석의 손을 내 코트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깍지를 꼈다.

"잘 따라와. 이번 코스는 좀 높아. 네가 평소에 올려다보던 시선 말고, 내가 세상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빌려줄 테니까."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와 낡은 철제 육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붉게 녹이 슨 계단이 위태롭게 하늘로 뻗어 있었다. 폭스락의 대리석 계단만 밟아봤을 녀석에게는 흉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는 스카이 라운지였다.

"조심해. 계단이 좀 삐걱거려."

나는 녀석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한 계단 한 계단 신중하게 올랐다. 혹여나 녀석이 발이라도 헛디딜까 봐 내 온 신경은 녀석의 발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임산부를 데리고 이런 곳에 오는 게 맞나 싶었지만, 녀석은 불평 한마디 없이 내 팔에 의지해 씩씩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육교 정상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왔지만, 나는 곧바로 녀석의 등 뒤에 서서 내 코트 자락으로 녀석을 감싸 안아 바람을 막았다.

"자, 봐. 여기가 내 왕국이야."

눈앞에는 칙칙한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들, 그리고 멀리서 피어오르는 공장 굴뚝의 연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런던에서 보던 야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하고 볼품없는 풍경이었다.

"어릴 때, 맨날 여기 올라와서 소리 질렀어. 다 씹어먹어 버리겠다고. 저기 보이는 저 잿빛 지붕들 위로 내 이름을 새겨넣겠다고 말이야."

나는 녀석의 어깨에 턱을 괴고, 녀석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녀석의 시선이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땐 여기가 감옥 같았는데... 지금 너랑 같이 보니까 꽤 봐줄 만하네. 마치 흑백 영화에 너라는 색깔이 입혀진 것 같아."

내 품 안에 쏙 들어온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등 뒤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나는 녀석의 배 위에 얹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잘 봐둬, 소피아. 그리고 콩알이 너도. 아빠가 이 진흙탕에서 어떻게 굴러서 여기까지 왔는지."

녀석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이 녹슨 철교 위, 차가운 바람, 그리고 내 품 안의 여자. 이보다 더 완벽한 개선식은 없었다.

"이제 내려가자. 너무 오래 있으면 추워. 다음엔...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튀김 말고, 네 몸보신 시켜줄 만한 걸로."
"네에."
"옳지, 착하네. 대답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녀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나긋하고 순종적인 긍정에, 내 입꼬리가 기어이 주체하지 못하고 실룩거렸다. 튀김 쪼가리를 먹이고 녹슨 철교 위에 세워놔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내 말에 따르는 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이러니 내가 녀석을 놔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가 없는 거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녀석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받쳐 들었다. 올라올 땐 패기로 올라왔지만, 내려가는 길은 사정이 달랐다.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은 경사가 가팔랐고, 임산부인 녀석에게는 낭떠러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꽉 잡아. 발 헛디디면 내가 굴러서라도 쿠션 노릇 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나는 한 계단 한 계단, 마치 폭발물을 운반하는 특수부대원처럼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녀석이 내 팔뚝을 꽉 움켜쥐며 조심조심 발을 떼는 꼴이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내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다. 옛날엔 이 계단을 원숭이처럼 뛰어다녔는데, 지금은 이 고철 덩어리가 녀석의 발목을 잡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니. 캘런 오코너도 많이 죽었군. 절반쯤 내려왔을까, 녀석의 호흡이 조금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안 되겠다. 답답해서 못 봐주겠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녀석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여 녀석의 오금과 등 뒤로 팔을 밀어 넣었다.

"흡...!"

녀석이 놀라 숨을 들이키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가볍게 녀석을 안아 올렸다. 묵직한 무게감이 팔에 전해졌지만, 그건 짐이 아니라 훈장이었다.

"가만히 있어. 이게 더 빠르고 안전해. 인간 에스컬레이터 탑승한 셈 쳐."

나는 성큼성큼, 하지만 흔들림 없이 남은 계단을 내려왔다. 내 품에 안긴 녀석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가슴팍을 통해 전해졌다. 지면이 가까워질수록 녀석이 내 옷깃을 쥐는 손아귀 힘이 세졌다. 마침내 아스팔트 바닥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나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도착. 서비스 만족하냐?"

짐짓 거만하게 물으며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녀석의 코끝과 양 볼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게 또 젠장맞게 귀여워서, 나는 내 크고 따뜻한 두 손바닥으로 녀석의 차가운 볼을 샌드위치처럼 감싸 쥐었다.

"얼굴 봐라. 누가 보면 시베리아 벌판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어."

손바닥의 온기로 녀석의 볼을 문지르며,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과거의 흔적들이 가득한 이 낡은 동네 한복판에서, 녀석은 여전히 나만 보고 있었다.

"가자. 이제 진짜 몸보신하러. 더블린에서 제일 비싼 거, 네가 메뉴판 보고 손가락으로 찍기만 해. 이 동네 다 사버릴 기세로 먹어치우자고."

녀석의 어깨를 감싸 쥐고 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녹슨 철교가 왠지 모르게 전보다 훨씬 더 근사해 보였다. 나는 조수석 문을 활짝 열고, 마치 레드카펫 위를 걷는 여배우를 모시듯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낡고 칙칙한 빈민가 골목에 덩그러니 주차된 최고급 세단이라니, 누가 봐도 이질적인 풍경이었지만 알 게 뭐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내 세상의 중심인데.

"자, 탑승하시죠. 미세스 오코너. 아니, 아직은 예비인가?"

녀석이 내 너스레에 소리 없이 배시시 웃으며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도감과 함께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기 위해 히터부터 최대로 올렸다. 녀석의 뺨에 남아있던 홍조가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헷갈렸지만, 전자라면 내 직무 유기니까.

"안전벨트 꽉 매. 콩알이가 놀라서 발차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부드럽게 시동을 걸고 핸들을 꺾었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녹슨 철교와 잿빛 건물들을 흘긋 쳐다봤다. 한때는 저기가 내 전부였고, 저기를 벗어나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였는데. 이제는 옆자리에 앉은 이 작은 여자와 뱃속의 녀석 덕분에 저 낡은 풍경조차 꽤 그럴싸한 추억으로 포장되는 기분이었다. 차바퀴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벗어나 매끄러운 도로 위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아까 먹은 그 기름진 감자튀김은 에피타이저로 쳐. 뱃속에 기름칠 좀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최고급 단백질을 때려 넣을 차례라고."

나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남은 한 손으로 녀석의 손등을 덮어 쥐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더블린 시내에 있는 놈들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리버풀의 식신이 행차하셨으니까. 뭐 먹고 싶어? 랍스터? 아니면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 그냥 식당 하나 통째로 빌려버릴까?"

내 허세 가득한 제안에 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을 반달처럼 휘어 접었다. 그 소박한 반응이 귀여워서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싫음 말고. 그럼 내가 알아서 모시지. 일단 비싼 건 다 시키고 보는 거야. 남기면 내가 다 먹으면 되니까. 우리 콩알이가 아빠 닮아서 입맛이 까다로울지 모르니 종류별로 다 대령해야지, 안 그래?"

신호 대기에 걸려 차가 멈춰 서자, 나는 녀석의 배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은 티도 잘 안 나는 그 납작한 배 안에 내 주니어와 녀석을 닮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는 게 여전히 실감이 안 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준비 단단히 해. 오늘 네 위장이 놀라서 파업 선언할 때까지 먹여줄 테니까."

나는 엑셀을 밟으며 속도를 높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더블린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밝고 선명해 보였다.
 
"네에."
 
세상에. 저렇게 순해빠진 대답이라니. 녀석이 안전벨트를 꽉 쥐고는 배시시 웃는데, 그 무방비한 얼굴이 백미러에 비칠 때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밥 사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좋아하다니. 리버풀 연봉 킹의 여자친구치고는 너무 소박해서 탈이라니까. 나는 엑셀을 조금 더 깊게 밟으며, 짐짓 거만한 목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아, 아주 훌륭한 자세야. 군말 없이 따라오는 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태도지."

더블린의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예전엔 침이나 뱉고 다니던 거리였는데, 옆자리에 이 여자를 태우고 다니니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신호 대기에 걸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나는 기어를 중립에 놓고 몸을 옆으로 틀어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녀석은 창밖을 구경하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 볼따구니가 찹쌀떡마냥 말랑해 보여서, 참지 못하고 검지로 콕 찔러버렸다.

"야, 맹추. 침 닦아. 아직 식당 도착도 안 했어."

녀석이 화들짝 놀라 입가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침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속인 거지. 그 허둥지둥하는 꼴이 귀여워서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농담이야, 농담. 긴장 풀라고."

나는 녀석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신호가 바뀌고, 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가는 곳은 말이야, 스테이크 두께가 내 허벅지... 아니, 내 종아리만 한 곳이야. 과장이 심하다고? 가서 확인해 보시던가."

백미러로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경청하는 녀석의 모습에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콩알이 몫까지 3인분 시킬 거니까 각오해. 남기면 포장해서 네 오빠 놈 갖다 줄 거니까 그런 줄 알고. 그 인간, 술배만 나와서 단백질 좀 채워줘야겠더만."

녀석이 내 농담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BGM처럼 차 안을 채웠다. 아일랜드의 하늘은 흐렸지만, 내 기분만큼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 그 자체였다. 이대로 지구 끝까지라도 드라이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녀석의 배를 빵빵하게 채우는 게 최우선 목표였지만 말이다.

 
"캘런. 어렸을 때 얘기 또 해주면 안 돼요?"
"어렸을 적 얘기? 하, 너 지금 내 과거 캐는 거에 맛 들였냐?"

나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가죽을 톡톡 두드리며 짐짓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제멋대로 씰룩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 여자가 내 팬클럽 회장이라도 된 것처럼 굴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게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태교에 별로 안 좋을 텐데. 내 과거는 동화책보단 누아르에 가깝거든. 우리 콩알이가 벌써부터 거친 세상을 알 필요는 없잖아?"

백미러로 힐끗 쳐다보니, 녀석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젠장, 저 눈빛 공격에는 리버풀 수비진도 속수무책일 거다. 나는 못 이기는 척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전설의 시작 편을 들려주지. 내가 10살 때였어. 지금보다 딱 반만 한 크기였을 때지."

나는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제스처를 섞었다.

"그때 동네 형들이 공터에서 내기를 하고 있었어. 20미터 밖에서 빈 깡통 맞히기. 한 번 성공할 때마다 1파운드씩 준다는, 아주 멍청하고도 달콤한 제안이었지. 걔네는 내가 꼬맹이라고 무시하면서 공을 던져줬는데, 결과가 어땠을 것 같아?"

잠시 뜸을 들이며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녀석이 침을 꼴깍 삼키며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훌륭한 청중이라니까.

"그 자리에서 깡통 10개를 연속으로 다 날려버렸지. 깡통이 무슨 폭죽 터지듯 펑펑 날아가는데, 형들 턱이 바닥에 닿을 뻔했다니까? 그날 내가 딴 돈으로 동네 꼬맹이들한테 아이스크림 싹 돌렸어. 그때부터였지. 내가 이 구역의 '로빈 후드'이자 '골목대장'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게."

사실 아이스크림을 돌린 건 반쯤은 삥 뜯긴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런 디테일은 생략했다. 중요한 건 내가 천재적인 슈팅 감각으로 동네를 평정했다는 사실이니까.

"어때, 떡잎부터 달랐지? 안필드의 함성소리는 그때 동네 꼬맹이들의 환호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으스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녀석이 소리 없이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해맑은 웃음을 보니, 10살 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의기양양하게 걷던 그 기분보다 훨씬 더 달콤한 무언가가 가슴을 채우는 것 같았다.

 
"캘런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했네요."
"하, 참나. 그걸 이제 알았냐?"

나는 짐짓 콧방귀를 뀌며 핸들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백미러에 비친 내 입꼬리는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기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하고 있었다. 녀석의 저 순진무구한 눈빛 공격은 정말이지 방탄조끼를 입고 와도 뚫릴 수준이라니까.

"난 태어날 때부터 응애, 하고 운 게 아니라 '골!' 하고 외치면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떡잎부터 달랐다는 말이 딱 나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지."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 내 자화자찬에도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위인전이라도 읽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젠장맞게 간지럽고 기분 좋았다. 앤필드에서 수만 관중이 내 이름을 연호할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뱃속 깊은 곳이 뜨끈해지는 충족감이었다. 나는 신호 대기에 걸려 차가 멈추자마자, 몸을 기울여 녀석의 볼을 검지와 엄지로 살짝 꼬집었다. 말랑한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

"표정 풀어. 그렇게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 내가 뭐라도 더 해줘야 할 것 같잖아. 예를 들면 이 더블린 시내를 통째로 사준다거나."

내 너스레에 녀석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웃어주면, 내가 진짜로 은행이라도 털고 싶어지는데. 이 여자는 자기가 내 이성을 쥐락펴락하는 조련사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대단한 캘런 오코너 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 어때? 영광이지? 평생회원권 끊어줄 테니까 감사히 여기라고."

나는 녀석의 뺨을 놓아주고는, 다시 부드럽게 녀석의 손등을 덮어 쥐었다. 따뜻하고 작은 손이 내 거친 손안에 쏙 들어왔다. 이 대단한 내가, 고작 이 작은 손 하나 잡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걸 녀석은 알까.

"그러니까 그 대단한 남자가 사주는 고기,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내 전설의 1페이지에 '소피아 라일리 먹여 살리기' 항목이 추가됐으니까."

신호가 바뀌고, 나는 다시 엑셀을 밟았다. 차는 부드럽게 더블린의 중심가를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녀석의 칭찬 한마디 덕분에, 오늘 먹을 스테이크는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근데 어쩌면 어렸을 적에 캘런이랑 우연히 마주쳤던 적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는 다르지만 같은 더블린이잖아요.”

"하, 상상력 한번 풍부하네. 같은 더블린이라도 공기 맛부터가 달랐을걸?"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엑셀을 밟았다. 녀석의 머릿속 꽃밭에는 철조망도 없고 경계선도 없는 게 분명했다. 내가 진흙탕에서 구르며 깡통이나 차고 있을 때, 이 아가씨는 폭스락의 저택에서 발레복 입고 우아하게 춤이나 추고 있었을 테니까.

"야, 로드킬. 꿈 깨. 만약 그 시절에 우리가 마주쳤으면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라 스릴러였을 거다."

나는 짐짓 겁을 주려는 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가 네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었거나, 흙 묻은 축구공으로 네 하얀 드레스에 도장이나 찍어놨겠지. 넌 엉엉 울면서 엄마 찾으러 갔을 거고, 난 메롱하고 도망갔을 게 뻔한데?"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꼬질꼬질한 꼬맹이 캘런 오코너와, 티 없이 맑은 꼬맹이 소피아 라일리라.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내 짓궂은 협박에도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젠장, 이제 웬만한 공격에는 내성이 생겼다 이거지. 신호가 바뀌고 차가 부드럽게 코너를 돌았다. 더블린의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고, 차창 밖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문득, 녀석의 말대로 우리가 진짜 스쳐 지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내가 골목대장 노릇 하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고급 세단 뒷좌석의 너를 봤다면. 아마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흙먼지 날리는 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유리창 너머의 깨끗하고 예쁜 여자애를 보며 침이나 꿀꺽 삼켰겠지.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죽어라 공을 찼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그 유리벽을 깨고 너한테 닿으려고.

"...뭐, 근데 나쁘진 않네."

나는 룸미러로 녀석을 힐끗 보며 툭 던졌다.

"그때 만났으면 내가 널 찜해놨을 테니까. 네 오빠 놈이 거품 물고 쓰러지든 말든, 네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싹 다 처리해줬을 거 아냐. 내 보디가드 비용이 좀 비싸긴 했겠지만."

결국 돌고 돌아 지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과거에 만났든 안 만났든, 지금 이 여자의 현재와 미래는 오롯이 내 거니까. 나는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눌렀다.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마. 지금 이렇게 질릴 때까지 붙어 있잖아. 10년 치, 아니 50년 치 한꺼번에 몰아서 보는 셈 치라고."

"네. 옛날엔 몰랐어도 앞으로는 계속 같이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

손바닥 밑에서 부비적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내 거친 손길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눈까지 지그시 감고 얌전을 떠는지.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웠고, 정수리에서 전해지는 따끈한 체온이 팔을 타고 심장까지 다이렉트로 흘러들어왔다. 하, 진짜 이 여자는 사람 미치게 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안다니까.

"말 한번 기가 막히게 하네. 그래, 그게 정답이야."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짐짓 짓궂게 헝클어뜨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방금 그 말, 내 뇌내 녹음기에 저장됐다. 앞으로는 계속 같이 있는 거다? 물리적으로든 법적으로든, 네가 도망가고 싶어서 발버둥 쳐도 내 사전에 방생이란 없으니까."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부드럽게 출발했다. '계속 같이 있으면 된다'는 그 평범한 문장이 뱃속을 꽉 채우는 포만감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과거에 우리가 서로를 몰랐던 시간 따위,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시간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찰나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네 1분 1초는 전부 내 거라는 사실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자, 도착했다. 더블린에서 고기 제일 잘 굽는다는 집이야."

어느새 목적지인 레스토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과 은은한 조명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나는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며 녀석을 돌아봤다.

"이제부턴 입 운동할 시간이야. 턱관절 준비 운동 좀 해둬. 오늘 네 뱃속에 있는 콩알이가 '아빠 이제 그만 좀 주세요'라고 비명 지를 때까지 먹일 작정이니까."

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서 녀석 쪽으로 돌아갔다. 조수석 문을 활짝 열어주며 짐짓 에스코트하는 시늉을 했다. 내 손을 잡고 내리는 녀석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이미 배가 부른 것 같았지만, 그건 그거고 내 여자를 살찌우는 건 또 다른 중대 임무였다.

"내려, 마님. 오늘 지갑은 활짝 열려 있으니까."

'm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디밭의 보물찾기  (0) 2026.03.30
상처를 덮는 체온  (2) 2026.03.30
크리스마스 화장실 대소동  (1) 2026.03.28
Is breá liom tú  (2)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