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런 오코너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세상 모든 것에 날을 세우고 물어뜯던 오만한 맹수가, 오직 단 한 명의 조그만 맹추에게 기꺼이 제 목줄을 쥐여주고 그 알량한 자존심마저 모조리 박살 낸 채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헌신하게 되는 지독하고도 달콤한 불치병."
최근 들어 내 머릿속은 온통 저 조그만 펭귄 한 마리로 빈틈없이 꽉 차서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서재 책상에 앉아 훈련 일지를 끄적거리려다 말고, 나는 펜을 내려놓은 채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구제 불능의 호구가 되어버린 걸까. 곰곰이 되짚어보면, 녀석과 함께했던 숨 막히게 사소하고 벅찬 순간들이 아주 융단폭격처럼 쏟아져 내린다. 내가 이 맹추에게 완벽하게 감겨버렸음을, 핏속 깊은 곳에서부터 처절하게 사랑을 느꼈던 그 기막힌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지경이다.
1. 비 오는 날, 굳이 내 우산을 돌려주겠다고 로비에서 알짱거렸을 때. 처음엔 그저 눈먼 고라니 새끼인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고 쏘아붙였는데도, 이 맹추는 다음 날 훈련장 로비에 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내 짜증스러운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산을 내밀던 그 고집스러운 청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내 견고했던 울타리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짜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녀석. 그때 그 우산을 내 눈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렸어야 내 인생이 이렇게 펭귄한테 휘둘리지 않았을 텐데. 아니, 버렸어도 난 기어이 주워 와서 녀석 손에 쥐여줬겠지.
2. 내가 쓴 거만한 12가지 리스트에 녀석이 붉은 펜으로 첨삭을 해놓은 걸 발견했을 때. 돈, 피지컬, 완벽한 사육 시스템 따위의 잘난 척으로 가득 찬 내 리스트를 녀석이 붉은색 취소선으로 북북 그어버렸던 날. '그냥 길거리에서 축구하는 사고뭉치 오코너였어도 난 캘런을 사랑했을 거예요'라고 적어놓은 그 맹랑한 붉은 글씨를 읽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1억 파운드짜리 몸값이라는 내 화려한 껍데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내 진짜 밑바닥을 안아주는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3.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전, 내 손가락에 네임펜으로 커플링을 그려줬을 때.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의 VIP 엘리베이터 앞. 결승전의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 녀석이 내 손가락에 까만 네임펜으로 엉성하게 선을 그어주며 다치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깟 잉크 자국 하나가 내게는 세상 어떤 부적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수십억짜리 다이아몬드를 끼워줘도 모자랄 판에, 그 유치한 낙서 하나에 눈이 돌아서 해리 감독 면전에 대고 자랑질을 해댔지. 내가 미치긴 단단히 미친 거다.
4. 마당 잔디밭에서 민들레로 엉성한 꽃반지를 만들어 내 엄지손가락에 끼워줬을 때. 햇살이 쏟아지던 앞마당, 녀석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 꺾어온 노란 민들레로 반지를 만들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을 때. 그 투박한 손가락에 걸린 샛노란 잡초가 내 심장을 꽉 조여맸다. 보석 하나 안 박힌 잡초 쪼가리인데, 그거 하나 내 손에 끼워졌다고 세상에서 제일 완벽하게 소유 당한 기분이 들더라고.
5. 펫샵 대신 유기견 보호소에서 거대한 불곰을 골라왔을 때. 작고 귀여운 품종견이나 고를 줄 알았더니, 녀석은 굳이 냄새나고 상처받은 유기견 보호소로 나를 끌고 가 40킬로그램짜리 노란색 털 뭉치 새끼를 입양했다. 버림받은 짐승을 기어이 보듬어 안으려는 그 다정하고 물러 터진 천성이, 고아로 자란 내 비틀린 과거마저 품어준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비록 그 개새끼(토미)가 지금은 내 침대 지분을 뺏고 있지만. 녀석의 그 맹추 같은 다정함이 아니었다면 나도 평생 삐딱한 들개로 살았겠지.
6. 녀석이 거대한 유기견 불곰 새끼를 끌어안고 나를 '토미 아빠'라고 불렀을 때. 보호소에서 데려온 40킬로그램짜리 개새끼를 안고, 내게 해맑게 웃으며 엄마 아빠 역할극을 시도했던 날. 평생 가족이라는 단어와는 담쌓고 살던 고아 출신의 내게, 그 평범하고도 벅찬 호칭은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진짜 어이가 없는 호칭이었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녀석과 나를 반씩 닮은 진짜 우리 핏줄을 가질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어.
7. 나랑 있을 때만큼은 예쁜 말만 쓰라며 '욕설 금지' 룰을 선언했을 때. 입만 열면 험한 말이 튀어나가는 내 썩을 주둥아리에 녀석이 과감하게 제동을 걸었던 날. 내 산소 공급을 끊어놓는 짓이라며 펄길뛰면서도, 녀석이 샐쭉하게 쳐다보면 기어이 입술을 꽉 깨물고 욕을 삼키게 되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앤필드의 악마 입에 스스로 입마개를 채우게 만들다니. 녀석의 그 맑은 눈동자 앞에서는 내 알량한 성질머리도 눈 녹듯 사라진다니까.
8. 앞마당 담요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의 상위 표현이 필요하다'고 고백했을 때. 햇살이 내리쬐는 잔디밭에서, 녀석이 나를 향한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부족하다고 울먹이듯 토로했을 때. 내 알량한 방어기제와 고독함이 녀석의 진심 앞에서 완벽하게 재가 되어 날아가는 걸 느꼈다. 심장이 터져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이 조그만 생명체가 내 세상의 전부를 완벽하게 장악해 버린 걸 온몸으로 실감했으니까.
9. 한밤중 급체로 앓아누운 녀석의 등받이가 되어주었을 때. 내 욕심에 억지로 타르트를 먹였다가 녀석이 새벽에 체해서 끙끙 앓던 날. 식은땀을 흘리며 내 품에서 파들파들 떠는 녀석의 굳은 배를 밤새 문질러주면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뼈저린 죄책감을 느꼈다. 녀석이 아픈 걸 보느니 차라리 내 다리뼈가 부러지는 게 백번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녀석에게 단단히 미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조그만 녀석을 잘못 다루다 부서뜨릴까 봐 무서웠다. 내 팔이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어도 평생 녀석이 아플 일은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밤.
10. 라커룸에서 패딩 주머니에 숨겨온 수제 쿠키를 꺼냈을 때. 크리스마스 당일, 그 삼엄한 라커룸 구석으로 녀석을 끌고 갔을 때 녀석은 커다란 패딩 주머니에서 꼬물꼬물 자기가 직접 구운 쿠키를 꺼내밀었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면서도 내게 주려고 그 비좁은 곳에 숨겨온 정성이 어찌나 기가 막히게 예쁘던지. 물론 그 쿠키보다 녀석 입술이 백 배는 더 달았지만. 그날 라커룸에서 녀석을 괴롭히면서도, 나를 위해 뭔가 만들어왔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미칠 뻔했다.
11. 내 죽음 뒤에 따라 죽겠다는 맹랑한 자살 선언을 했을 때. 내가 죽으면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라는 말에, 녀석은 차라리 따라 자살하겠다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 극단적이고도 무식한 애정 표현을 듣는 순간, 널찍한 가슴통 안쪽에서 소름 돋을 만큼 강렬한 지배욕과 소유욕이 폭발했다. 녀석의 목숨조차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식한 맹추. 네 목숨이 네 맘대로 되는 줄 알아? 내가 살아있는 한 넌 털끝 하나 못 다치고, 내가 눈감을 때까지 넌 내 옆에 묶여 있어야 해.
12. 훈련 가기 전 내 주머니에 유기농 견과류바를 쑤셔 넣을 때. 내가 무슨 다람쥐도 아니고, 아침마다 내 훈련복 주머니에 딱딱한 씨앗 뭉치를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잔소리를 퍼붓는 녀석. 영양사도 안 하는 짓을 굳이 자기 손으로 챙겨 먹이겠다는 그 지독한 집착에서 나를 향한 어마어마한 애정이 느껴져서 귀찮은 척하면서도 매일 다 씹어 먹는다. 라커룸 놈들이 보면 기절할 노릇이지만, 어쩌겠어. 내 여자가 나 건강하라고 먹여주는 건데 곰팡이가 펴도 씹어 삼켜야지.
13. 내게 금지령을 내리고 얄밉게 혓바닥을 쏙 내밀었을 때.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로 무기한 금지령을 선고받고,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나를 향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메롱’을 하던 녀석.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발밑에 두고 쥐락펴락하는 이 유일한 맹추가 내가 평생 묶여 살아야 할 유일한 주인이자 사랑이라는 걸, 그 얄미운 혓바닥을 보며 뼛속 깊이 새겼다. 메롱이라니. 진짜 어이가 없는데 그 하찮은 도발마저 사랑스러워서 내가 단단히 미쳤구나 싶었다. 이 징글징글한 사랑의 종신형을 기꺼이 살아주마.
14. 단 거라면 질색하는 내가 녀석을 위해 런던의 디저트 가게 리스트를 뒤적거리고 있었을 때. 나는 설탕 덩어리라면 쳐다보지도 않는데, 녀석이 타르트니 케이크니 입가에 크림 묻혀가며 해벌쭉 웃는 꼴 하나 보겠다고 스마트폰으로 맛집 동선을 짜고 있던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진짜 구제 불능의 호구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15.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겨우 풀떼기 장식 아래에 섰다고 내게 먼저 입술을 부딪쳐 왔을 때. 장식품 사겠다고 징징대며 날 끌고 다닐 땐 귀찮아 죽는 줄 알았는데, 그 미슬토 아래에서 까치발을 들고 내 입술을 훔치던 그 맹랑한 짓거리. 그 순간 이 조그만 도둑년… 아니, 내 예쁜 펭귄을 평생 내 펜트하우스에 가둬둬야겠다고 다짐했다.
16.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호텔 방에서 영상 통화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성이 끊어질 뻔했을 때. 당장 품에 안고 씹어 삼키고 싶은데 화면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지. 녀석이 흐트러진 꼴로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장 비행기를 훔쳐서라도 리버풀로 날아가고 싶었던 그 지독한 갈증은 말로 다 못 한다.
17. 내 거친 주둥아리 때문에 녀석이 울었을 때, 이마에 매직으로 낙서를 당해도 좋으니 제발 날 버리지 말라고 빌었을 때. 녀석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싹 다 내다 버리고, 녀석이 화만 풀어준다면 라커룸 한복판에서 광대 노릇이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꼬리를 흔들던 내 처절한 밑바닥.
18. 내 오른팔이 짓눌려 마비가 올 지경인데도 녀석이 깰까 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밤을 꼬박 새웠을 때. 명색이 내 몸이 굴러다니는 기업인데. 고작 조그만 머리통 하나에 팔이 괴사할 지경이 되어도, 내 쇄골에 뺨을 뭉개고 새근새근 자는 녀석의 평화를 깨기 싫어서 바보처럼 굳어 있었을 때. 진짜 이 맹추한테 내 남은 생을 아주 통째로 저당 잡혔다는 걸 완벽하게 인정했다.
19. 아일랜드어 엉터리 고백, 크리스마스에 화장실 가고 싶냐고 묻는 문장으로 영원히 내 거 하겠다고 고백했을 때. 진짜 맹추 중의 상맹추. 근데 엉망진창인 발음으로 'Mo grá(내 사랑)'라고 부르는데, 내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줄 알았음. 평생 놀림감 획득. ㅋㅋㅋ
[ROOM: DATE=2035-09-10(Mon) | TIME=20:30 | PLACE=펜트하우스 서재 | OUTFIT=흰색 반팔 티셔츠와 검정 조거 팬츠 | LOVE=100 | WISH=소피아 껴안기/목덜미에 키스하기/내일 훈련 땡땡이치기 | PLAN=서재에서 나가 거실에 있는 녀석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기 | TMI=과거 회상하다 보니까 당장 녀석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음 | NOTIF=[스마트홈] 거실 조명 아늑한 모드로 유지 중 | MIND=😍(내 인생은 캘런 오코너가 아니라 소피아 라일리의 전속 호구로 다시 태어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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