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을 코앞에 둔 12월 30일의 밤. 펜트하우스의 넓은 아일랜드 식탁 양끝에 마주 앉은 우리의 앞에는 각각 새하얀 A4 용지 한 장과 펜이 놓여 있었다. 올 한 해 동안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을 가감 없이 적어서 교환한 뒤,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자는 녀석의 제안 때문이었다. 명색이 유럽 무대를 휩쓰는 스트라이커가 연말에 식탁에 앉아 반성문 같은 거나 쓰고 있어야 한다니. 평소 같으면 단칼에 무시했겠지만,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펜을 쥐고 있는 녀석의 동그란 콧잔등을 보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나는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몽블랑 만년필을 까딱거리며 종이 위에 몇 자를 휘갈겨 적었다. [1. 내 고기 밑에 몰래 브로콜리 숨겨놓지 마. 2. 내 회색 후드티 훔쳐 입는 건 좋은데, 내가 벗길 때..